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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시장경제는 대공황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이로 인해 성장과 고용에 막대한 손실이 벌어졌고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경기하락의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대공황으로 인하여 '규제된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모델이 출현하는 길이 닦이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 세계의 경제공황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생존하려면 오로지 규제를 받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는 생각을 낳았으며 이 생각은 거의 모든 정치적 경향의 사람들 사이에 확고한 신념이 되었다.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제 1차 세계대전 직후와 달리 서유럽과 자유 진영의 다른 나라들의 경제발전을 지지하기 위하여 능동적으로 지구적 헤게모니를 키워나갔다.


   당시 생겨난 규제모델에서 하나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 바로 브레튼우즈협정이었다. 이 협정은 무엇보다 우선 미국과 영국이 브레튼우즈라는 미국의 작은 마을에 모여 협상한 결과였다. 이 협상이 종결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44년 7월이었으며 채택된 것은 1947년이었다. 선진 서구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이 협정에 들어와 있었다. 이 협정의 특징은 고정환율제였지만, 기초여건상 불균형을 안고 있는 나라들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변형시킬 수 있었다. 환율은 외환시장에서 오르내리도록 허락되었지만, 이는 제도적으로 고정된 중심 환율로부터 플러스마이너스 1퍼센트라는 좁은 폭으로 제한되었다. 필요할 경우 각국의 중앙은행은 이자율, 외환시장 개입, 자본시장 개입 등의 수단으로 환율을 안정시킬 것이 요청되었다. 실제로 이 협정이 의미하는 바는 환율수호의 책임을 오로지 미국 이외의 나라 중앙은행들만이 떠안게 되며 미국 연방준비위원회는 그렇게 해서 결정된 환율을 그대로 따라가는 완전히 수동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국제적인 환율을 안정시키는데 부담의 배분이 비대칭적이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시기와 그 직후에 미국의 지배력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미국 달러에 대한 신뢰를 부양하기 위해 미국은 브레튼우즈협정 이외에도 중앙은행이 찍어낸 달러로 표기된 신용화폐를 황금으로 태환해 줄 것을 약속하였으며, 35달러=1온스를 그 태환비율로 정하였다. 따라서 미국 밖의 여러 나라 중앙은행들로서는 달러를 준비금으로 보유하는 것이나 금을 보유하는 것이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브레튼우즈 회의은 또한 IMF도 창출하였다. IMF는 환율방어에 어려움에 부닥친 나라들에 대출을 제공해 주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세계은행은 이와 달리 경제개발정책의 기능을 맡고 있었다. 국제통화체제는 고정환율제뿐만 아니라 여러 규제에 전 방위로 종속돼 있었다. 개발도상국들의 자본이동은 아주 적었으며 민간에 의한 대출은 사실상 전혀 없었지만, 선진국들 사이에는 국제적인 자본이동이 있었으며 이는 광범위한 규제를 받에 되었다. 각국이 자국 환율을 방어하고 경상수지 불균형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본이동에 대한 규제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권리는 심지어 오늘날에도 IMF의 정관에 명시되어 남아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세계경제에 일정한 통화상의 틀을 가져다 주었다.비록 몇몇 나라에서는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가 생겨났지만, 그 불균형의 정도는 GDP에 대한 백분율로 따져 그 이전 시절의 세계경제 상황과 비교하여 보면 그다지 큰 정도가 아니었다. 통화위기는 드물었고 아주 가끔씩 벌어지는 일이었기에 IMF는 대부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진 이후와 비교해볼 때 당시에는 IMF가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각국의 국내 금융체제 또한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었고 상이한 금융분야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부동산금융의 경우에는 금융시스템의 다른 부분들과 단절되어 국가의 긴밀한 통제를 받는 것이 예사였다. 소비자 신용은 종속적인 역할만을 수행하였고, 신용팽창은 비즈니스 부문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소비수요의 역동성에 기초가 된 것은 소득 증대였다.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 이자율에는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심지어 전통적으로 자본시장에 기초한 금융체제를 가져왔던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조차도 주식시장이 특출한 역할을 맡았건 것은 아니었다. 유럽 대륙과 일본 그리고 여러 개발도상국들에서는 은행중심의 체제가 지배적이었으며 여기에는 소위 '주거래은행'이 기업들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기능했다.


   전후에 나타는 자본주의모델은 수많은 상이한 형태들을 취하였다. 일본이나 그 밖의 아시아의 여러 시장 지향적 나라들에서는 국가개입이 광범위하게 행해졌고 여기에는 또 광범위한 산업정책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다시 대출을 시행함에 있어서 정치적인 배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외무역은 국가의 보호주의적 개입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 같은 나라의 경우 직원들이 회사에 엮여 있어서 일자리를 잃을 위험이 거의 없었다. 이 노사모델은 종신고용을 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그 밖에도 가부장적 온정주의를 공공연히 내보이는 수많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나라들에서는 소득분배 또한 눈에 띄게 평등주의적이었다. 비록 유럽에서는 아시아만큼 국가의 역할이 전 방위적이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규모의 산업정책 개입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은 또한 강력한 복지국가의 형태를 띤 계급간 타협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기업경영에 대한 노동자들의 참여의 기회가 창출되었다. 소위 '경제민주주의'라는 것을 통하여 독일에서는 직원들이 대기업의 감독이사회는 물론 심지어 경영이사회에도 개표를 보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유럽에서 임금인상은 일반적으로 단체협상으로 조절된다. 이는 강력한 노동조합과 경영자 단체의 협상으로 마련되며 한 산업전체, 혹은 더 나아가 전체 경제 차원에서 적용된다. 오늘날 상황과 비교해보면 유럽에서도 소득분배는 상당히 잡혀 있었다.


  심지어 미국조차도 전후시기에 지금까지 말한 것과 기본적으로 상당히 동일한 모델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갤브레이스 같은 이들은 미국의 경영자들을 '공공의 후생을 주요한 목표로 삼는 국가관료들'이라고 특징지은바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저 파멸적인 자본주의 게임에 빠진 도박꾼들은 당시로서는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일본이나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 또한 중산층의 사회였고, 극단적인 절대 빈곤과 극단적인 부는 아주 이따금 나타날 뿐이었다.


   이러한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확립된 것으로서, 지구 경제에 독일과 일본의 경우와 같은 일련의 경제기적들을 줄줄이 가져다 주었다. 또 이들뿐만 아니라 모둔 서방국가들이 실질성장률로 볼 때 좋은 경제발전을 기록했다. 이 기간동안 실업률은 비교적 낮았으며 심지어 서독을 비롯한 몇몇 나라들은 1960년대에 노동부족을 경험하여 외국에서 노동자들을 모셔오는 것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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